
[한국시니어신문] 매일경제가 금융감독원·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와 가구추계를 바탕으로 연령별 순자산 규모를 분석한 결과, 만 60세 이상 고령층 자산규모가 4,307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가계 자산의 절반 이상을 고령층이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지갑을 어떻게 여느냐에 따라 우리나라가 일본과 같은 '잃어버린 30년'을 겪을 수도, 아니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을 수도 있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일본의 교훈은 명확하다. 1990년대 일본에 찾아온 30년의 경제 침체의 근본적 이유는 바로 가파른 인구고령화에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낀 고령인구가 소비를 줄이고 집안에 현금을 쌓아두면서 경기침체가 시작됐다. 몸이 아프기 시작하는 고령인구 증가로 의료비는 폭증했고, 정부재정 지출도 급증해 일본은 국가부채가 GDP 대비 260%에 달해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일본은 1970년 고령화사회(7%)에 진입한 후 1994년 고령사회(14%), 2005년 초고령사회(20%)에 도달했다. 고령사회에 진입한 1994~95년 국가부채가 GDP의 60%대에 불과했지만 불과 4년 만인 1999년 100%를 넘어섰다. 이어 2005년 초고령사회 진입 후 급증하는 국가부채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2012~13년 GDP의 200%를 돌파했다. 고령화 물결에 한번 풀린 재정 브레이크는 제어할 동력을 잃은 것이다.
일본의 반전 노력...지역포괄케어시스템이 가져온 변화
최근 일본은 고령화 터널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파괴적 혁신'을 통해 의료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쓰고 있는 것이다. 건강관리 주체를 국가 중심에서 지역책임제로 전환하는 '지역포괄케어시스템'을 도입하고, 환자 치료를 요양·재활 중심으로 바꿨다. 급성기병원을 줄이고 재활·요양병원을 늘렸으며, 의사·간호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홈케어(왕진)를 활성화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정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2024년부터는 의사 지역별 편중 해소를 위해 건보료를 활용해 지방근무 의사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2020년에는 간호사의 일부 의료행위를 인정하고, 장롱 의사면허 소지자의 연수 후 복직을 지원했다. 의사부족 지역과 과잉지역 간 의사파견 요청도 쉽게 개선했다. 컴퓨터·스마트폰을 활용한 온라인 진료를 도입하고 보험을 적용했으며, 처방의약품 자택 수령을 가능하게 한 것도 같은 해의 일이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4년 12월 23일 기준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가 1,024만 4,550명으로 전체 인구의 20%를 돌파해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한국은 2000년 고령화사회(7%), 2017년 고령사회(14%)를 거쳐 불과 7년 4개월 만에 초고령사회에 도달했다. 이는 일본(11년)보다도 빠른 세계 최고 속도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는 더욱 암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다. 2030년에는 노인인구 비중이 25.3%에 달하고, 2035년에는 3명 중 1명이 노인인 사회가 된다. 2040년에는 약 35%, 2050년에는 40%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된다. 일본이 걸어간 길을 우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인다.
시간과의 싸움...건강보험 2033년, 장기요양보험 2030년 고갈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재정전망은 위기감을 더한다. 건강보험 적립금은 2024년 말 25.3조원에서 계속 감소해 2033년 고갈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은 더욱 심각해 2024년 말 2.1조원에서 2030년 고갈이 예상된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도 보인다. 2025년 현재 정부는 스마트 헬스케어 서비스, AI 돌봄 서비스 등 시니어를 위한 다양한 헬스케어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비대면 건강관리 서비스가 체계적으로 제공되고 있다. 노인 건강생활 실천과 자가 건강관리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하는 이 사업에 참여한 노인들은 6개월간 체계적인 비대면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정부의 대응...에이지테크 5대 중점 분야 육성
보건복지부의 예산 변화도 눈에 띈다. 의료기관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 실증 및 도입 지원 예산이 2024년 135억원에서 2025년 150억원으로 증액됐다. 재활 분야 디지털의료기기소프트웨어 사용적합성평가 지원에는 2025년 하반기 25억원이 신규 편성됐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2025년 3월 '에이지테크 기반 실버경제 육성 전략'을 논의하며 5대 중점 분야를 선정했다. 돌봄 로봇, 웨어러블 및 디지털 의료기기, 노인성 질환 치료, 항노화 및 재생의료, 스마트홈 케어가 그것이다. 정부는 5대 중점 분야의 기술 경쟁력 확보를 위해 '에이지테크 기술개발 로드맵'을 수립하고, 5개 권역별 고령친화산업혁신센터를 활용한 '에이지테크 리빙랩'을 구축할 계획이다.
4,256조원 글로벌 시장...한국의 기회는?
정부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에이지테크 시장 규모는 2025년 3조 2,000억 달러(약 4,256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은 에이지테크를 고령자 자립생활기술(AIP Tech), 고령자 돌봄 기술(CareTech), 고령자 기술 수용 서비스의 3대 핵심 분야로 구분하고 있다.
액티브 시니어들의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 이용이 급증하고 있으며,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보험 산업도 정책 변화와 플랫폼 혁신을 통한 성장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신호다.
만 60세 이상이 보유한 4,307조원. 이 거대한 자금이 어디로 흐르느냐에 따라 한국의 미래가 결정된다. 이 돈이 병원비로만 쓰인다면 국가재정 파탄이다. 하지만 이 자금이 혁신적인 헬스케어 서비스, 예방의학, 건강한 노후를 위한 투자로 쓰인다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일본처럼 소극적 대응으로 30년을 잃을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 혁신으로 세계가 벤치마킹하는 모델을 만들 것인가. 선택은 우리 손에 있다.
2024년 12월 초고령사회 진입 이후 9개월이 지난 2025년 9월 현재, 위기는 확실히 기회가 되고 있다. 단, 조건이 있다. 기술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AI가 아무리 똑똑해도 할머니의 외로움을 완전히 달랠 수는 없다. 하지만 AI가 24시간 지켜보고 있다는 안전감, 응급상황에서 즉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신뢰감은 줄 수 있다. 이것이 시니어 헬스케어의 본질이다.
앞으로 5년이 골든타임이다. 지금 우리가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느냐에 따라 2030년 우리나라 모습이 결정될 것이다. 고령층의 4,307조원이 소비가 아닌 투자로 쓰이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 답은 정책입안자들의 회의실이 아니라, 실제 어르신들이 생활하는 현장에 있다. 기계가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기계가 사람을 도울 수는 있다. 그 균형점을 찾는 것이 초고령사회를 맞은 한국의 과제다.
[한국시니어신문 김규민 기자] dailyk@ksenior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