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니어신문] 고령층의 약은 해마다 늘어난다. 혈압약으로 시작해 당뇨약, 위장약, 진통제, 수면제까지 더해지면 하루 여러 번 약을 챙겨야 하는 노인이 적지 않다. 많은 이가 이를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으로 받아들이지만, 국제 의학계는 전혀 다른 경고를 내놓고 있다. 약이 많아질수록 부작용 가능성이 커지고 기존 질환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다중약물(polypharmacy)을 고령층 건강의 핵심 위험요인으로 규정한다. WHO는 하루 다섯 가지 이상의 약을 복용하는 경우 부작용과 복약 오류가 증가하며 약물 간 상호작용 때문에 어지럼증, 혼란, 부정맥 같은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한국·일본·이탈리아처럼 고령화가 빠른 나라에서 다중약물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약 종류가 많을수록 낙상·입원률이 상승한다는 분석이다.
국내 자료도 경고를 뒷받침한다. 건강보험공단과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층 가운데 상당수가 매일 다섯 가지 이상의 약을 복용한다. 75세 이상에서는 복용 약이 7종 이상인 고위험군이 늘고 있다. 질병이 많아서라기보다 진료과가 달라 처방이 겹치는 경우가 많고 의사가 모든 약을 파악하기 어려워 약이 계속 누적되는 구조다.
국제 학술지들도 다중약물의 위험성을 반복해서 지적한다. 미국의학회내과지(JAMA Internal Medicine)는 항불안제·수면제·진통제를 함께 복용한 노인에서 낙상 위험이 두 배 이상 높아졌다고 보고했다. 유럽호흡기학회지(European Respiratory Journal)는 약물 상호작용으로 인한 어지럼증과 혼란이 응급실 방문 증가로 이어진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미국의학잡지(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도 약물 개수가 늘수록 인지 저하가 빠르게 진행된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런 위험성은 노인이 직접 느끼는 증상과 맞물린다. 어지러움, 피로, 불면, 기억력 저하 등이 나타나면 대부분 “나이가 들어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물 부작용이 원인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증상을 해결하려고 다시 약을 추가 처방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른바 ‘약을 해결하기 위해 약을 늘리는’ 악순환이다.
WHO는 불필요한 약을 줄이기 위한 핵심 전략으로 정기적인 약물검토(Medication Review)를 권고한다. 약물 검토는 복용 중인 모든 약을 한 번에 점검해 중복 약물을 줄이고 약물 간 충돌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이 제도를 도입해 부작용 감소와 약물 절감 효과를 확인했다. 일부 사례에서는 약을 절반으로 줄였는데 오히려 어지럼증과 혼란이 사라졌다는 보고도 있다.
한국도 약물 관리 서비스 도입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여러 진료과의 처방이 누적되는 구조적 문제가 남아 있다. 노인의 건강을 지키려면 ‘약을 얼마나 먹느냐’가 아니라 ‘약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약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지만, 많아지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 고령층의 증상 악화가 노화 때문이라고 단정하기 전에 약물의 영향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점이 국제 연구가 내리는 공통된 메시지다.
[한국시니어신문 김규민 기자] dailyk@kseniornews.com



















